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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커피 사건

ˍ 2020. 9. 23.

(선을 넘는 녀석들 고종편 설민석의 강의 정리. 배우 문가영 출연)

 

고종 커피 사건

유길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 미국 유학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유길준이 미국과 유럽 문물을 보고 쓴 게 서유견문인데 그 당시 커피를 처음으로 기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술 내용을 보면 서양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 숭늉이나 냉수 마시듯이 커피와 주스를 마신다, 이렇게 써놨다고 한다. 중국어로 카페이라고 하는 한자를 우리나라 발음으로 읽으면 가베 라고 한다. 서민들은 이 커피를 탕국인데 서양에서 왔다고 양탕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고종은 정관헌에서 외국 사절들 맞이하는 연회를 하면서 커피를 궁중다례로 대접을 했다고 한다. 궁중다례의식에 사용할 정도면 커피를 너무너무 좋아하셨나 보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는 그 커피 때문에 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는다. 대원군이라는 라이벌이 사라진 이후에 1897년에 대한제국을 만들었는데 커피 사건은 1898년에 일어난 일이다.

 

고종이 아관파천 했을때 러시아인들과 말을 해야하는데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없었다. 그런데 짠 하고 나타한 게 김홍륙이다. 이 사람이 원래 천인이다. 천인 출신인데 두만강 쪽에 살았던 것이다. 상크페테르부르크까지 가서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익히고 당시 베베르라는 러시아 영사를 따라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분이 수완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관에서 고종의 옆에 딱 붙어서 통역을 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만들어지자 김홍륙은 왕의 스피커이자 최측근이 된다. 김홍륙이 러시아나 외국에 이권을 주고 뒤로 챙기는 등 권력을 휘두르자 상소가 올라온다. 고종은 김홍륙에게 실망하여 태형을 100대 치라고 한다. 김홍륙은 한을 품는다. 그래서 당시 고종과 아들이 마시는 커피에다 치사율의 아편을 탄 것이다. 고종은 약간 향이 이상해서 마시지 않았는데 아들 순종이 그걸 그냥 마신 것이다. 순종은 그때부터 많이 병약해지면서 후유증으로 치아가 18개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몸도 몸이지만 심적으로 그때 충격을 받아서 아마 훗날 순종의 무기력도 이런 것도 좀 연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커피 사건 이후에 고종은 더욱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고종이 임오군란(1882년) 때 큰일 날 뻔하고, 갑신정변(1884년) 때 잘못될 뻔하고, 그리고 동학농민운동(1894년) 때 또 굉장히 충격 받고, 을미사변(1895년) 때는 자기 바로 근처 방에서 명성황후의 비명소리를 듣는 그런 일을 당하고, 커피 사건으로 모두를 의심하게 되고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 엄청난 고통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아마 지금 심리상담가나 정신과 의사분들이 상담하면 공황장애부터 대인기피증 그런 정신병을 앓고 살지 않으셨을까 생각된다.

 

독살 시도 사건이 있었던 곳이 정관헌이다. 고종은 이 사건 이후로 너무 불안하니까 훗날 연세대학교를 만드신 언더우드 선교사의 감시하에 안전하게 음식을 만들게 하고 그걸 딱 닫아서 자물쇠를 채우고, 고종이 보는 앞에서 자물쇠를 열게 해서 드셨다는 얘기가 있다. 

 

 

양무호 사기사건

양무호는 일본 미쓰이 물산에서 구입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데 이미 일본에서 9년 정도 사용을 했었고 성능도 떨어지고 완전 중고였다고 한다. 양무호를 굉장히 큰돈을 들여서 구입했는데 사용을 한 번도 못해보고 그냥 제물포 안에 계류만 시켜놓고 있다가 나중에 러일전쟁이 터질 때 일본이 또 징발해 갔다고 한다

 

 

석조전과 국민의 세금

1904년 덕수궁에 불이 난다. 그래서 다른 궁으로 피신할 때도 없고 이제는 또 불이 나면 안 되기때문에 그럼 불이 나지 않는 서양식 건물을 만들어보자, 그래서 석조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석조전

석조 기술이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나은 영국인 기술자와 일본인 기술자가 합작을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게 비용이 한 300만 원 정도 들었는데 오늘날 돈으로 2500억원에 달하는 건물이다. 이 돈은 국민들의 피 땀 눈물이 담긴 세금으로 거둔 돈이라고 한다. 그때도 기획재정부가 있었는데 그게 탁지부였다. 기재부인 탁지부에서 국민 세금을 걷어 그중의 일부를 황실에 비용을 떼어준다. 그럼 그걸 가지고 운영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광무황제께서는 황권 강화라는 미명하에 황실 수입을 늘리기 시작한다.

 

황실 수입을 담당하는 게 궁내부라고 있고 그 궁내부에 내장원이라는 걸 또 둔다. 그래서 국가의 세입의 영역을 황실의 내장원 수입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냐면 황실은 부자가 되는데 국가 정부에 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제국 시절에 정부에서 공무원들 봉급을 못준다. 그래서 황실에서 돈을 빌려다가 봉급을 주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궁내부 내장원의 10년간 수입을 따져보니까 4350만 원인데 지출을 봤더니 4150만 원이다. 거의 다 쓴 것이다. 그런데 4350만 원이 지금 돈으로 얼마냐면 2조 가까이 된다. 그게 어디 갔냐면 황실 품위유지비, 음식, 의전, 연회, 사치, 내탕금으로 썼다고 한다.

 

광무황제 생일에는 그때 돈으로 20만 원, 오늘날 돈 85억원을 쓴다. 그때 우리나라가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사는데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너무 심한 사치다. 그런데 당시 광무황제가 어떻게 생각했냐면 황권을 높이는 필요한 경비로 생각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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