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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정인숙 사건

ˍ 2020. 9. 16.

(15일 방송된 역사저널 그날 방송내용을 정리해서 올린 글. 역사저널은 배우 이시원의 미모에 감탄하면서 보게되는 방송이다. 이날은 정인숙 사건에 대해서 방송되었다)

 

1970년 3월 17일. 통행금지를 불과 몇 분 앞둔 시각. 고급 승용차 안에서 26살 젊은 여성이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피살자의 이름은 정인숙. 바로 3선을 노리던 박정희 정권을 뒤흔든 정치 스캔들의 시작이었다. 그 당시에 총기 소유가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는 통금까지 실시하면서 통제를 했던 군사정권 시절이기 때문에 총기는 아무나 소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사건이 발생하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대대적으로 불법 총기류를 단속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970년은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매우 예민하게 민감한 시기였다. 그런데 그 시기에 정치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된 한 여성이 그것도 권총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많이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문제는 그 사건이 매우 의혹을 많이 남긴 상태에서 흐지부지 결국 덮어졌다는 것이다.

 

정인숙은 누구였는가

사망자 정인숙은  당시 나이 26살이고 자신의 소유 승용차 안에서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사망한 채로 발견이 되었다. 이 여성이 소지하고 있던 차량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일제 코로나라고 하는 아주 고급 승용차를 정인숙이 소유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승용차를 26살에 불과한 여성이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고 문제는 고급 승용차만 있는 게 아니었다. 차 안에서 발견된 게 일반인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물건들이 나왔다. 롤렉스 시계, 다이아 반지 그리고 밍크 코트 같은 고가의 물품들이 거기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 여성은 무직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의혹이 커진 것이다. 차에서뿐만 아니라 사건 직후 집에 가 보니 집에서는 또 어마어마한 물건들이 나왔다고 한다.

 

사건 직후 경찰은 정인숙 씨의 집 장롱 안에서 미화 2000달러, 또 우리돈 390만 원이 들어 있는 예금 통장, 그리고 180만 원 어치의 수표를 발견했다. 당시 공무원의 한 달 월급이 1만 원 정도다. 그러니까 계산을 해 보면 정인숙 씨 집 장롱 안에는 당시 공무원의 몇십 년 치 연봉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인숙 씨 집에서는 정 씨의 여권도 발견됐는데 그 당시에는 여행 자율화 시대가 아니었다. 아무나 마음대로 해외를 다닐 수 없었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해외에 나갈 때는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단수여권이 발급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정인숙 씨의 여권은 무제한으로 해외에 드나들 수 있는 회수여권이었다. 여권에는 이미 미국과 일본에 다녀온 기록까지 남아 있었다.

 

회수여권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복수여권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 이 회수여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국회의원도 쉽지 않았고 장관이나 그 이상의 최고위급 공무원들만이 회수여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일반인인 정인숙 씨가 회수여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사실이다.

 

그런데 당시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건 바로 정인숙의 수첩이었다. 이 수첩 안에는 20명이 넘는 남성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 수첩에 들어 있는 이름이 국무총리 정일권,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 그리고 대통령 박정희 이름까지 이 수첩 안에 들어 있다는 소문이 있다. 이 수첩 안에 어떤 이름이 들어있는지는 그 당시에도 지금까지도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럼에도 당시에 이 정인숙 리스트에 이름이 없으면 권력 실세가 아니다, 이런 말까지 돌았다고 한다. 

 

이런 소지품이라든지 집에서 나왔던 물품들도 굉장히 이상한 것들이지만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벌어졌던 여러 가지 수사의 모습들도 그렇게 정상적인, 평범한 모습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 현장이 발견된 이후 2시간 만에 그 사건 현장이 깨끗하게 치워졌고 그 사건 현장에 있었던 정인숙 씨의 시신은 마포경찰서로 옮겨져서 그냥 주차장에 놓여 있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그 당시에 과학 수사가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50년 전이라고 하더라도 현장을 보존하지 않고 2시간 만에 현장을 치워버리고 특히나 시신을 인근에 있는 가까운 병원에 이송하는 게 아니고 경찰서 주차장에 방치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같으면 목이 열 개라도 버티기 어려운 그런 상황이다. 특히나 말단 담당 형사가 자기 마음대로 그런 처리를 한 것은 아닌 거로 보여진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검찰에서 이 사건을 다루게 됐는데 검찰의 강력부가 투입되지 않고 공안부가 투입된다. 그런데 이 공안부라고 하는 것은 주로 간첩 사건이나 국가 안보하고 관련된 중요한 사건에만 투입이 된다. 그리고 공안부 검사들 중에서도 어떤 검사가 이 사건을 맡게 되냐 하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측근으로서 정말 굵직한 공안 사건들만 담당했던 최대현 검사가 이 사건을 맡게 된다.

 

오빠가 용의자?

그런데 사건의 직후에 용의자가 특정이 된다. 그런데 그 용의자가 북한에서 오거나 또 공안적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이 아니고 바로 사건 당일에 정인숙 씨가 타고 있었던 코로나 승용차를 몰았던 정인숙 씨의 친오빠, 정종욱이라는 사람이 용의자로 특정된다. 그러나 설혹 친오빠가 어떤 문제가 있어서 동생을 살해할 만한 당위성이 있다 치더라도 차 안에서 총기를 사용해서 동생을 살해하는 경우는 드물다. 정말 동생을 살해하려는 마음을 먹는다면 한적한 곳에 가서 독살을 한다거나 목을 조른다거나, 이 경우라면 교통사고를 위장해서 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총으로 살해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리고 범행에 사용된 총기를 찾지 않고 이 사건을 덮었다. 사실 총기를 찾는다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총기에도 지문이 있다. 총기 자체에 묻는 지문도 있지만 총신에 있는 강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게 일치한 경우에는 범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총기를 찾지 않고 수색도 머지않아서 그냥 멈춰버린다. 그리고 이 사건을 종결을 했다. 그래서 여러모로 이상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경찰은 용의자로 특정된 오빠를 철저하게 통제했습니다. 정종욱 씨도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 병원 병실 앞을 바리케이트로 쳐서 외부인들을 철저하게 막았고, 그래서 기자들도 가서 취재하려고 하지만 잘 안되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의혹이라고 할 수 있다.

 

용의자 정종욱 씨는 처음에는 혐의를 적극 부인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하나 나온다. 정종욱 씨의 소매 끝에서 총기를 발사할 때 생길 수 있는 화약흔이 발견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결국 자백을 하게 됐다. 그러면 어떠한 경위로 동생을 살해했느냐 하고 범행 동기를 물어 보니까 동생의 문란한 사생활, 게다가 오빠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 때문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다가 실천을 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 했고, 강도로 위장을 하려고 생각을 했다,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사건은 6일 만에 황급히 종결이 되고 정종욱 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된다. 어쨌든 정종욱 씨 자신이 자백을 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종결되는 듯 했다.

 

눈물의 씨앗

그런데 많은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다. 당시 정인숙 씨는 미혼이었지만 3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아들의 아버지가 보통 사람이 아니고 권력 최고위층이다라는 소문이 떠돌게 된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나타나냐 하면 대학가를 중심으로 당시 최대 유행가였던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노래를 가사를 바꿔서 부르는 노래가 유행을 하게 된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원래 이랬던 원곡을)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의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이렇게 바꾸어 부른다)

 

이 노래의 미스터 정은 바로 정일권 국무총리였다. 정일권 국무총리는 이력이 굉장히 화려하다. 정일권은 식민지 시기 때 만주군 장교를 하고 또 일본 육사도 나오는데 이게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걸어갔던 그 길과 똑같다. 그래서 둘이 그 인연이 있고, 그리고 해방 이후에 정일권은 육군참모총장도 하고 그리고나서 박정희 시대에는 외무부 장관도 하고 그리고 국무총리도 한다. 그런데 이 국무총리 기간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최장수, 가장 오래 한 국무총리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는 1973년에서 1979년까지 국회의장까지 맡게 된다. 한마디로 대통령 빼놓고는 중요한 요직을 두루 거쳤다, 모두 다 섭렵했다 라고 볼 수 있다. 김종필이나 이후락이나 또는 김형욱 같은 사람들은 실세인 만큼 사실은 굉장한 권력을 갖고 있었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고 했었는데 이런 것들이 사실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사실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정일권은 알려진 바로는 매우 일처리가 조용하고 자신의 야망이나 욕심을 드러내지 않는 그런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특별히 큰 의심 없이 큰일들을 맡길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 정일권 총리가 정인숙 아들의 아버지란 소문이 났나?

앞서 말한 회수여권은 누가 발급해 줬냐 하면 정일권 국무총리의 비서관, 신성재 씨가 발급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두 사람 관계가 보통 관계가 아니라는 소문들이 더 퍼지게 되고 한참 나중에 3살짜리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된다. 그런데 그 아들이 1993년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한다. 그래서 이게 만약에 제대로 이루어지면 확실하게 결론이 나올 수 있었는데 그 소송이 진행 중에 정일권이 1994년 별세한다. 그래서 이 소송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정확하게 그 아빠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결국 미궁에 빠지게 된다. 세간에서는 그 아이가 박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정인숙은 유명한 요정 여러 군데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까 이른바 요정 내에서 정권의 실세라든지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정인숙이 20대 때 아르바이트 모델을 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미모 같은 게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누구의 눈에 띄었냐 하면 필동의 김 마담이라는 서울의 비밀 요정을 제일 먼저 세웠던 설립자, 이 사람 눈에 띄게 된 것이다. 이 사람은 계속해서 아마 이 정인숙을 쫓아다니면서 발탁하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정인숙 씨가 일했던 요정은 북한산 자락에 있는 선운각이라는 곳이다. 그런데 당시 대원각이나 청운각 같은 유명 요정들이 있었는데 선운각이 좀 특별했던 이유는 저기는 아무나 갈 수 있는 데가 아니고 정부의 실세들, 바로 대통령, 국무총리, 비서실장, 이런 사람들이 주로 드나드는 그러한 요정이었기 때문에 훨씬 좀 은밀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고 바로 이렇게 정부 최고위층들이 드나드는 요정에서 정인숙 씨가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접촉하고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서울은 요정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난입을 했었다. 정인숙 같은 경우는 미모,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게다가 영어에 능통했다는 것이다. 상당히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외교관 같은 외빈들이 올 때는 정인숙이 단골로 불려가는 정도가 됐고 그러다 보니까 인기가 상당히 높아지게 됐고 그게 결국 최고 권력층하고 연결되는 고리가 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정 정치

흔히 요정 정치라고 부르는 것인데 사실 한국 정치사에서 부끄러운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여성들을 어떤 매개로 해서 도구로 해서 여기에서 은밀한 그리고 부정한 거래들이 많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당시에는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자라고 하면 고학력자에 속했다. 그래서 거기에 출입하는 여성들 같은 경우는 대다수가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술만 접대하고 옆에서 시중만 드는 게 아니고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런 거 등등을 귀담아 들었다가 그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한테 전달해주고 하면서 정보를 전달해 주는 그런 역할까지 했었던 것이다.

 

요정이라고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만들어진 식민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정말 중요한 정치적 논의들은 국회에서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사적인 영역인 최고위 정치인의 집, 그 자택에 가서 논의를 했다. 그래서 가령 당시 50년대 여당이었던 자유당 같은 경우는 이기붕의 집이 중요해서 이기붕의 집이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리기까지 했고, 야당 인사들 같은 경우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굉장히 큰 집이 있어서 그런 사랑방에 모여서 여러 가지 정치적인 현안들을 논의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흔히 우리가 사랑방 정치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제 1960년대가 돼서 5.16 쿠데타 이후 새롭게 권력을 군인들이 쥐게 되는데, 군인들에게는 이러한 사랑방 정치의 문화가 없다. 그러다 보니까 군인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사적인 영역에서의 논의들을 요정으로 끌고 가서 요정 정치가 훨씬 더 활성화되고 더 광범위하게 퍼지는 그런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요정이 더 활성화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은 또 있는데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개발 붐이 불었다. 그때 부정청탁을 하기위해서 요정에서 만났다.

 

여성들 같은 경우 옆에 붙어서 담뱃불도 붙여 주고 밥도 떠 먹여주고 1:1로 접객 행위를 하다 보니까 거기서 접대를 받는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느 날 한순간 자기들이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으로 돼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하니까 안 될 일도 되고 부정한 방법도 다 되니까 효과가 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정 정치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확산하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서 너무 재미있는 장면이 나왔는데 배우 이시원씨가 "어떻게 하면 국민이 더 잘살까 좋은 나라 만들까 고민하는 게 정치인의 역할인데 요정에서 술 마시면서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겠어요? 네?"  이러면서 앞에 앉은 교수님에게 화난듯이 말하니까 교수님이 저는 안갔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 정치인들이 요정에 가는 것은 굉장히 일상적인 문화였다. 1967년 12월 6일자 신문 제목을 보면 '다시 고개 드는 요정 정치'라고 되어 있다. 여야 의원들이 함께 요정에 가서 거하게 술판을 벌이는 그런 일이 발생한 거다. 그러니까 이게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고 당시 야당의 신민당의 원내 총무였던 김영삼 총무가 제발 좀 지금은 자중해라, 지금은 요정 갈 때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렸다고 하는 내용이 담긴 기사이다. 

 

1965년에 박정희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부 군인들의 쿠데타 음모가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적발이 되었다. 당시 이 쿠데타를 모의했던 사람들이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 요정 정치로 인한 부정부패 심화였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요정 정치와 부정부패가 심각해지고 있었고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공직자들의 요정 출입을 금하라, 이런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 조치를 해도 요정의 숫자는 오히려 더 늘었다. 그래서 60년대 중반에 비밀 요정이 서울시 내에 70개 이상 정도가 난입을 했고 정치적이나 외교적으로 굵직굵직한 사안들이 있을 때마다 요정에서 회동을 하는 일은 이어졌다고 한다.

 

요정에 굉장히 중요한 인물들이 가서 굉장히 중요한 얘기들을 나눴기 때문에 당연히 중앙정보부가 그 요정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 공작을 한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에는 이런 요정만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고 이걸 나중에 미림팀이라고 해서 요정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불러서 거기에 누가 왔는지 또 누가 누구를 만났는지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또 심지어는 돈을 얼마나 썼는지 이런 것들을 다 정보를 파악해서 나중에 자신들의 정치 공작에 활용을 했다, 이렇게 알려져 있다.

 

정인숙 씨의 어떤 죽음도 약간 거기에서 오가는 그 정보에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알 수가 없는데 확실한 것은 정인숙이라는 존재가 권력층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한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정인숙 씨 본인도 그런 과실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내 뒤에 높으신 분이 있다, 그리고 내 아이의 아버지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이런 식의 어떤 언질들을 주변에 많이 줬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미국에 가서 정인숙 씨가 주미 한국대사를 부를 때 손가락을 이렇게 까딱까딱하면서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

(이말을 듣고 배우 이시원이 앞에 앉은 교수님에게 손가락을 까딱까딱 하는데 너무 웃겼다)

 

게다가 바로 이 시점이 대통령 선거를 딱 1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 선거가 그냥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 바로 69년에 변칙적으로 3선 개헌을 해가면서까지 어렵게 치르는 선거였다. 만약에 이 정인숙이라고 하는 이 여성으로 인해서 스캔들까지 터지게 되면 선거에 굉장히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 당시에 시대적 배경을 보면 여성 유권자들 같은 경우 정치인을 뽑을 때 항상 이야기했던 게 사생활이 깨끗한 사람을 뽑자, 이런 슬로건 하에 움직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너무 많이 정치인들이 혼외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 유권자 입장에서는 첩을 둔 사람은 정치인 뽑지 말자는 주장이 있었다. 

 

결국은 정인숙씨의 살해 동기가 어떻게 보면 누군가가 정권 유지를 위해서라도 그 여성을 처리하는 게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렇게 6일 만에 오빠가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끝났는데 이 사건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대전환이 있다. 정종욱 씨 오빠가 19년 2개월 정도 수형 생활을 마치고 가석방 돼서 나온 직후 동생을 죽인 건 내가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형을 다 살고 나서야 번복을 했냐하면 1970, 1980년대가 군부 독재시절이어서 자기가 이야기를 했을 경우에 그게 제대로 전달도 안 되고 오히려 더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올 때까지 오히려 입을 다물고 나왔을 때는 민주화 이후여서 비로소 이야기가 가능했을 수 있다.

 

사건의 진실은?

당시 수사 당국이 정종욱을 범인으로 특정한 이유 중 하나는 탄환의 발사각도 때문이었다. 정인숙 씨를 쏜 총알 중 한 발은 정확하게 정 씨의 왼쪽 가슴을 관통해 차량 시트까지 뚫고 들어갔다. 이를 토대로 당시 국과수가 밝혀낸 발사 위치는 운전석을 기준으로 30도에서 35도 반경이었던 것이다. 이 경우에 이렇게 30도 정도가 맞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 또 수사 당국에서 정종욱 씨가 범인이라고 이야기한 건 부족함은 없다. 그러나 총알의 사입구와 사출구의 크기를 봤을때 30cm 정도는 떨어진 거리에서 쏘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운전석에서 팔을 뻗으면 약 10cm밖에 안되기 때문에 좀 떨어진 거리에서 발사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전석이 아니라 운전석 바깥의 특정인이 이 비슷한 각도에서 총을 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정종욱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서 본인의 허벅지에 총기를 발사했다고 이야기했지만 상처의 위치가 쏘기 불편하고 어려운 각도여서 나중에 정종욱 씨는 제삼자가 총을 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정종욱 씨 이야기처럼 제삼자가 총을 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수사기관에서 좀 더 면밀히 이 사건을 조사했다면 이 사건의 결과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종욱 씨 주장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났던 그 당시에 본인은 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낯선 남자 두 사람이 와서 톡톡 두들기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집 앞에 다 도착했을 무렵 차에 와서 문을 두드리니까 왜 그러나 하고 문을 처음에는 조금만 열었다고 한다. 국무 총리의 급한 심부름으로 왔다는 것이다. 소리가 잘 안들려서 더 열어주는 순간 갑자기 손이 쑥 들어오면서 총소리가 났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의혹들이 워낙 많다 보니까 이것이 국회에서도 문제가 된다. 그래서 사건이 1970년 3월에 일어났고 5월에 임시국회가 열려서 많은 의원이 이 문제를 가지고 정부를 추궁한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시 와우아파트가 무너져서 3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을 하는 대참사가 일어나는데 그 5월 국회의 속기록을 보면 와우아파트에 대한 질의보다 정인숙 사건에 대한 질의가 더 많다. 그 정도로 국회의원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여러가지를 따지고 했었다는 것이다.

 

결국 요정 정치 문화들 속에서 정인숙 사건이 발생한 건데 그는 어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이 없다 보니까 결국에는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사건이 덮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정인숙 사건 이후에 이 요정 정치의 문화가 더 확산하는 모습을 보인다. 관광 종사원 등록증이라는 것이 1970년대 남성들을 접대하는 여성들에게 발급되기 시작하는데 원래는 이런 등록증은 통역이라든지 가이드에게 발급이 되는 건데 70년대가 되면 접객 여성들에게까지 발급되는 것이다. 이 증을 갖고 있으면 통행 금지와 관계없이 심야에도 돌아다닐 수 있게 되고 어떤 호텔이든 별 문제 없이 출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국가 권력은 도대체 왜 이러한 등록증을 만들었을까. 바로 이 여성들을 이용해서 관광상품을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기생관광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이런 기생관광의 정점에는 정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1973년 같은 경우에는 정부 산하기관에 요정과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져서 요정을 정부 차원에서 관리를 하고 그 요정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교육을 시킨다. 왜냐하면 이 여성들이 주로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외국인 관광객들이어서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도록 교육을 시키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1970년대부터 일본인 관광객들이 한국에 많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일본인 관광객들이 90% 이상이 남성들이었다고 하고 그들이 가장 관광에서 기억에 남는 것으로서 기생관광을 많이 꼽았다고 한다. 정부는 이런 것들이 달러가 귀하던 시절에 외국 돈을 우리가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로서 이 기회를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고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도구로, 상품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 성장이 우선되고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포장이 되면서 여성들은 사실 침묵하거나 억울한 일이 있어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인숙 사건이 결국 이렇게 흐지부지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당대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이런 요정 정치나 기생관광으로 보여지는 어떤 성에 대한 인식이나 여성에 대한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정인숙 사건이 발생한 지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우리가 이 사건을 다시 되짚어보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그러한 관행과 문화들을 좀 더 우리 미래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바꿔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게 요즘 들어서 김영란법도 생기고 사회 문화도 굉장히 많이 건전해지고 있어서 그런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게 참 다행스럽고 이 기세와 추세를 몰아서 더 맑아지길 기대해 본다. 살인사건보다 큰 일은, 우선순위는 없다. 그런데 그 살인 사건이 일종의 가십거리 수준으로 처리됐고 누군가 관심 갖지 않았다는 게 서글프고 초동수사, 현장 보존, 그리고 총기를 찾지 못했다면 지금 같으면 아예 기소 자체가 안 될 것이다. 범죄사를 연구하다 보면 그 시대상이 보인다. 그때의 암울한 어떤 시대상을 보면서 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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